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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위를 밟고 걸어도 된다. 나의 신체가 작품 안으로 걸어 들어가 내밀한 이야기에 참여하는 경험, 당혹스러우면서도 짜릿했다. 지난 8월1일부터 서울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마크 브래드포드: 킵 워킹(Keep Walking)’전. 첫번째 전시실에서 관객을 맞이하는 작품은 전시실 바닥 전체를 덮은 ‘떠오르다’(2019)이다. 작가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작업실 주변 거리에서 수집한 포스터와 광고 전단, 신문지 등 도시의 부산물을 여러 색의 캔버스 천과 잇고 엮어 수백 개의 긴 띠 형태로 재단한 초 두바이금융권 대형 설치 작업이다. 작품 위를 산책하다 보면, 겹쳐지고 긁히고 찢긴 거친 질감의 표면에 내가 밟은 흔적이 짙게 더해진다. 내 발자국이, 내 걸음 소리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미술관의 금기를 깨고 ‘작품을 마음껏 발로 밟으라’는 건 도시 공간과 경관에 쌓이고 얽힌 사회적 기억을 읽어보라는 선명한 메시지일 테다. 그 독해의 방법은 대출사금융 전시의 제목처럼 계속 걷는 것.
동시대 미국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마크 브래드포드는 1961년 로스앤젤레스 남부의 흑인 커뮤니티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지금도 거주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가 운영한 미용실은 지역 주민의 온갖 이야기와 소문이 오가는 사회적 공간이자 일상의 기록 저장소였다. 미용실에서 보낸 유년의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들에 그대로 적금금리계산기 포개진다. 초기 작업을 대변하는 ‘엔드 페이퍼’(end papers) 연작에서는 파마할 때 쓰는 반투명 종이인 엔드 페이퍼가 주재료로 쓰였다. 용지의 끝부분을 토치로 그을려 검은 테두리를 만든 뒤 캔버스에 격자 구조로 겹쳐 배치하는 콜라주 형식이다.



지도처럼 펼쳐진 브래드 직장인입니다 포드의 화면은 도시의 구조적 불평등의 흔적을 응축한다. 반투명 파마 용지를 사용한 ‘엔드 페이퍼\' 연작 중 ‘블루\', 2005.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에 소개된 ‘블루’(2005)는 엔드 페이퍼를 겹겹이 붙인 표면 위에 파란색 스텐실로 도시의 구역과 가로망을 새겨넣고 흑백 신문지를 1금융2금융차이 덧붙여 경관에 숨겨진 서사를 형상화한 작업이다. 얼핏 추상 지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종차별, 빈곤, 이주민 노동 같은 도시의 구조적 불평등의 흔적이 응축되어 있다. 이처럼 그의 회화는 일상적 소재의 재맥락화를 통해 도시라는 텍스트를 ‘문해’하는 행위로 전환된다.
‘엔드 페이퍼’뿐 아니라 ‘상업 포스터’ 연작, ‘기차 시간표’ 연작 등 브래드포드의 작업은 ‘사회적 추상’(social abstraction)이라 불린다. 그는 거리를 걸으며 모은 저소득층의 구직 전단지, 저가 임대료 광고지, 불법 의료 시술 벽보, 낙서가 덧칠된 폐자재 같은 재료를 뜯고 긁어내고 찢고 붙이고 쌓는 데콜라주(décollage)와 레이어링(layering) 기법으로 도시를 읽는 다른 감각을 열어젖힌다. 흑인, 퀴어, 도시 하층민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장소 경험을 추상의 화면에 감추지 않고 오히려 환기한다. 지도처럼 펼쳐진 그의 추상화는 갈등으로 얼룩진 도시의 풍경이자 그 파편의 아카이브인 셈이다. 멀리서 보면 비밀의 암호들로 구성한 대형 지도 같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켜켜이 쌓인 사회적 상흔이 드러난다. 관객은 그 표면의 균열을 따라가며 도시 공간의 상처를 읽게 된다.



기차시간표를 재구성해 600만명 흑인들의 대이주를 시각화한 ‘공기가 다 닳아 있었다\', 2025.,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제공


마크 브래드포드는 자신의 삶과 지역의 경관에서 시작해 미국 전체의 사회적 기억과 도시 현실로 주제를 확장해 왔다. 이번 전시의 ‘공기가 다 닳아 있었다’(2025)에서는 20세기 초중반 차별을 피해 ‘대이주’를 감행한 600만명 흑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기차 출발 시간과 지명을 담은 시간표를 재구성해 불안정한 이주와 흔들리는 정체성을 시각화한 작업이다.
한국 전시를 위해 구상한 신작 ‘폭풍이 밀려온다’(2025)에서는 2005년 미국 남부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기억을 소환한다. 폭풍이라는 통제 불가능한 힘과 정부의 미숙한 피해 복구 과정에서 버려진 도시 하층민의 삶을 미국 최초의 드래그 퀸인 윌리엄 도시 스완의 생애와 병치시킨다. 시대와 사회의 탄압에 저항한 스완의 형상으로 동시대 도시의 변방에 방치된 소수자들의 현실을 표현한다.
브래드포드의 사회적 추상은 추상회화의 실험적 변주를 넘어 도시의 공간과 삶을 읽는 문해 행위다. 그는 전단지 한 장과 벽보 한 조각, 부서진 간판과 희미한 낙서 모두를 사회적 기억이 얽힌 도시의 텍스트로 여긴다. 그것을 해체하고 다시 엮는 과정의 중심에 섬세한 ‘공간 문해력’이 자리한다. 우리는 흔히 도시의 공간을 시각적 풍경이나 물리적 표면으로만 경험한다.



서울 전시를 위한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 2025. 자연 재해와 도시 하층민의 삶을 병치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제공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다양한 이야기와 기억, 복잡한 관계와 긴장이 중첩되어 있다. 압도적인 높이로 들어선 아파트 단지에는 한때의 재개발 투쟁이 묻혀 있고, 작은 공원의 낡은 벤치에는 갈 곳 없는 노인의 긴 하루가 묻어 있다. 스타트업 사무실이 몰려드는 힙한 거리의 편집숍에는 남루한 공장의 자취가 남아 있고, 화려한 식물들로 매끈하게 장식된 정원형 카페에는 그 땅의 주인이었던 이름 없는 잡초들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공간 문해력은 놓치기 쉬운 도시의 이런 맥락과 층위를 감각하고 해석하는 역량이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도시의 경관을, 누군가의 흔적이 지워지고 덧입혀진 장소의 이야기를 새롭게 읽는 눈이다.
브래드포드의 작업은 앙리 르페브르의 ‘공간의 생산’(에코리브르, 2011)을 떠올리게 한다. 르페브르는 공간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고 강조한다. 모든 공간은 사회적 관계의 생산물이며, 동시에 사회적 관계를 조직하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브래드포드가 거리의 부산물을 뜯어 모으고 찢어 다시 붙이고 쌓은 화면은 바로 그 ‘생산된 공간’의 시각적 번역이다. 그의 번역은 우리에게 도시를 다르게 읽어보라고 권유한다. 182평(600㎡)의 전시실 바닥을 꽉 채우고 누워 관객의 참여를 초대하는 ‘떠오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도시 공간을 다시 읽도록 안내하는 지도다. 전시 제목이 공간 문해의 실천 방법을 조언한다. “계속 걸어봐.”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 환경미학자이자 조경비평가인 배정한이 일상의 도시, 공간, 장소, 풍경에 얽힌 이야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