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그라 복용 후 성생활의 만족도를 높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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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생활은 개인의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특히, 남성의 경우 나이가 들거나 건강 상태에 따라 성기능력이 저하될 수 있으며, 이는 심리적 스트레스와 관계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남성들이 비아그라와 같은 발기부전 치료제를 사용합니다. 비아그라는 효과적으로 발기를 도와 성생활을 개선할 수 있지만, 단순히 약물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아그라 복용 후 성생활의 만족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추가적인 노력과 전략이 필요합니다. 이 글에서는 비아그라를 복용한 후 성생활의 만족도를 높이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1. 적절한 복용 시간과 용량 준수
비아그라는 일반적으로 성관계 30분에서 1시간 전에 복용합니다. 약물이 체내에 흡수되어 효과를 발휘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복용 후 약 4~5시간 동안 효과가 지속되므로, 이 시간대를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의사와 상담하여 본인에게 적합한 용량을 정확히 지켜야 합니다. 너무 적은 용량은 효과가 미미할 수 있고, 너무 많은 용량은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2. 심리적 안정과 긍정적인 마인드
성생활은 신체적 요소뿐만 아니라 심리적 요소에도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비아그라는 발기를 돕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성적 욕구나 심리적 만족감까지는 보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관계 전 긴장을 풀고 파트너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트레스나 불안감은 성적 기능을 저하시킬 수 있으므로, 명상이나 심호흡 등을 통해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3. 파트너와의 원활한 소통
성생활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파트너와의 상호작용입니다. 비아그라를 복용한 후에도 파트너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면 성생활의 만족도는 떨어질 수 있습니다. 서로의 기대치와 욕구를 솔직하게 나누고, 성관계 중에도 서로의 반응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파트너와의 신뢰를 쌓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는 노력이 성생활의 질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4. 건강한 생활습관 유지
비아그라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규칙적인 운동, 균형 잡힌 식단, 충분한 수면은 전반적인 건강을 증진시키고, 성기능 개선에도 도움을 줍니다. 특히, 유산소 운동은 혈액 순환을 촉진하여 발기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효과적입니다. 또한, 흡연과 과도한 음주는 혈관 건강을 해치고 성기능을 저하시킬 수 있으므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5. 성적 판타지와 분위기 조성
성생활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단조로움을 피하고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아그라를 복용한 후에는 파트너와 함께 성적 판타지를 공유하거나, 새로운 포지션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성관계 전에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캔들라이트 디너, 부드러운 음악, 편안한 환경 등은 성적 긴장감을 높이고, 파트너와의 친밀감을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6. 부작용 관리와 주의사항
비아그라는 일반적으로 안전한 약물이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두통, 안면 홍조, 소화불량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작용이 발생할 경우, 약물 복용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하거나 의사와 상담하여 대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비아그라는 질산염 계열의 약물과 함께 복용할 경우 혈압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으므로, 기존에 복용 중인 약물이 있다면 반드시 의사와 상의해야 합니다.
7. 성적 자신감 회복
비아그라는 발기부전으로 인해 잃어버린 성적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물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성적 능력을 점차적으로 되찾아가는 과정을 겪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관계 후 파트너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스스로도 성공적인 경험을 축적해나가면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회복될 것입니다.
8. 정기적인 건강 검진
발기부전은 단순히 성기능의 문제가 아니라, 고혈압, 당뇨병, 심혈관 질환 등과 같은 기저 질환의 신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아그라를 복용하면서도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통해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저 질환이 있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치료함으로써 성기능 개선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결론
비아그라는 발기부전으로 고민하는 남성들에게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약물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성생활의 만족도를 충분히 높이기 어렵습니다. 적절한 복용 방법, 심리적 안정, 파트너와의 소통, 건강한 생활습관, 새로운 시도 등을 통해 비아그라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작용 관리와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통해 안전하게 약물을 사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비아그라를 복용한 후에도 더욱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기자 admin@119sh.info
“역사에 기록될 날, 그 현장에서 할 일이 있다는 건 멋진 일임을 느꼈다.”
합격까지 한 걸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영 일이 풀리지 않아 갑갑한 날이었다. 머리를 비우고자 ‘쇠질(무산소운동)’을 하고 막 샤워하고 나왔을 때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휴대전화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비상계엄’이라는 단어가 스쳤다. 기자 준비생 A씨는 다시 옷을 꺼내 입고 집 밖을 나섰다.
기자 준비생이 탄핵 국면을 지나며 SNS에 올린 소회. 이들은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의 오리지널바다이야기 국회부터 4월4일 탄핵 선고 당시 헌법재판소까지 여러 현장에 함께 했다. /본인 제공
한강 둔치에 차를 대놓고는 ‘따릉이’를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시끄럽고 정신없을 것 같던 국회 앞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따듯했다. 사람들은 ‘계엄 철폐’를 외치면서도 서로 가져온 음식을 나눴다. 카메라는 그런 시민들 야마토연타 을 비췄다. 국회 안에는 무장 군인이 들이닥쳤지만 시민들은 국회를 감쌌고, 그 뒤에는 기자들이 있었다.
12월 초, 한 해 공채가 끝나가고 있었다. 서른을 앞둔 나이에 ‘언론고시’를 그만둘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현장을 지키는 기자들을 보니 다시 한번 심장이 뛰었다. 시민의 자리를 넘어, 기자들이 서 있는 ‘저 자리’가 내가 있 사이다릴게임 어야 할 곳임을 느꼈다.
이날, 다시금 기자가 되기를 선택한 A씨는 11개월차 경제 매체 기자가 됐다. “밥벌이를 해야 한다면, 역사로 현장을 온전히 담아내는 일을 하고 싶다.”
기자 준비생이 탄핵 국면을 지나며 SNS에 올린 소회. 이들은 12월3일 비 야마토릴게임 상계엄이 선포된 날의 국회부터 4월4일 탄핵 선고 당시 헌법재판소까지 여러 현장에 함께 했다. /본인 제공
◇갈등을 뛰어넘어 위로와 공감을 그날 그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반으로 나뉘어버린 대한민국이 다시는 통합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을 앞둔 1월15일, 당시 한 릴게임오션파라다이스 일간지에서 2년차 사회부 기자로 일하던 B씨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대통령 관저 앞으로 향했다. 기온이 급격히 낮아져 유독 춥게 느껴지던 새벽이었다. 동이 틀 무렵 드디어 체포영장이 집행됐고, 체포 소식을 접한 대통령 지지자 한 명이 땅바닥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체포 촉구 집회에 참여하던 시민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다 잘될 거다’라고 속삭이며 그를 토닥였다.
좌와 우로 갈라져, 보수와 진보가 대치하는 모습에 우려가 터져 나올 때였다. 그런데 막상 현장의 시민들은 서로 적대시하거나 증오하지만은 않았다. B 기자는 갈등을 뛰어넘어 공감과 위로를 나누는 현장까지 조명하는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진보 성향의 언론사에서 수습 기간을 보낸 C 기자와 D 기자 역시 이념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우리 사회에 남아있음을 느꼈다. 탄핵 반대 시위, 기자로는 처음 나간 현장이었다. 명함을 전하면서도 긴장이 됐다.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폭행을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자 준비생이 탄핵 국면을 지나며 SNS에 올린 소회. 이들은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의 국회부터 4월4일 탄핵 선고 당시 헌법재판소까지 여러 현장에 함께 했다. /본인 제공
막상 현장에 나가자 시민들은 ‘빨갱이 언론’이라고 핀잔하면서도 시간을 들여 인터뷰에 응했다. 꽁꽁 얼어붙은 두 손을 보고는 고생이 많다며, 사탕과 핫팩을 꼭 쥐여 주기도 했다. “언론은 이념으로 인한 갈등을 극복할 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날 기자들은 몸소 느꼈다.◇‘함께’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 일요일이었지만 지하철역에는 사람이 쏟아질 듯이 많았다. 두툼한 패딩을 걸친 채 우르르 역사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목적지는 같았다. 남태령역 앞, 트랙터가 멈춰서 있는 곳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승호 아주경제 기자는 시민들이 경찰의 ‘차 벽’을 움직이는 모습을 봤다. 그 순간 ‘함께라면 이뤄낼 수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 시민들의 연대에 힘을 실을 수 있도록, 현장을 전하고 싶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을 꿈꾸던 학생 박승호에게 ‘기자’라는 새 꿈이 생겼다.
전북 전주에서는 ‘소외된 이웃과의 연대’가 이뤄지고 있었다. 12월7일, 비상계엄 직후 열린 첫 대규모 집회였다. 중앙지 기자를 꿈꾸던 전주 출신 C 기자는 이날 전북 지역 언론사에 입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발언대에 오른 시민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지역 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기자로서 고향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C 기자는 현재 전북지역 방송사 기자로 일하고 있다.
기자 준비생이 탄핵 국면을 지나며 SNS에 올린 소회. 이들은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의 국회부터 4월4일 탄핵 선고 당시 헌법재판소까지 여러 현장에 함께 했다. /본인 제공
이처럼 한겨울 광장엔 연대와 응원이 함께 했지만 그럼에도 ‘광장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지역 집회조차 열리지 않는 인적 드문 곳에 사는 사람들. 김민호 비즈한국 기자는 이들을 다룬 기사를 보며 목표가 생겼다. ‘소외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찾아낼 수 있는 눈을 갖겠다’는 것. 현재 김 기자는 노동과 기후 위기에 관심을 갖고 기사를 쓰고 있다.
1월부터 3월까지, 변화 없이 답답한 상황에서도 광장에서는 여러 감정이 오갔다. 1월 입사해 2주 만에 탄핵 찬성 집회를 취재한 권민주 경남도민일보 기자는 시민들의 열기를 몸소 느꼈다. 불법 계엄을 주동한 대통령이 체포되지 않고, 탄핵 심판이 늦어지고 있음에도 시민들은 주말이면 창원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칼바람에도 흩어지지 않는 시민들을 보며 권 기자는 ‘민주주의가 바로 서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주말을 반납하고, 집회 현장을 라이브로 송출하는 일이 즐거웠던 이유다. 주변에서는 “일 복도 많다”며 안쓰러워했지만, 권 기자는 현장에 갈 때면 가슴이 뛰었다.
기자 준비생이 탄핵 국면을 지나며 SNS에 올린 소회. 이들은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의 국회부터 4월4일 탄핵 선고 당시 헌법재판소까지 여러 현장에 함께 했다. /본인 제공
◇다시 ‘그날’이 온다면 박승호 기자는 서울 구로구에 살고 있다. 여의도까지는 자전거로 약 30분. 그날 새벽, 국회에 가기 위해 배낭에 짐을 모두 싸고 카메라도 챙겼다. 그런데 막상 발걸음이 향한 곳은 근처에 사는 친구 집이었다. ‘위험하지는 않을까.’ 막연한 두려움에 박 기자는 국회로 가지 못했다. 기자가 된 지금, 가장 아쉬움이 남는 날이다.
“계엄 그날, 현장을 기록하고 싶다.” 1년차 기자들은 지난해 12월3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에 입을 모아 이렇게 답했다. 통신사에 입사한 E 기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노트북을 챙겨 국회로 달려가, 통신사 기자답게 빠르게 속보를 쓰고 싶다고 했다.
“밤새 취재하며 ‘상보’와 ‘종합’ 기사까지 마무리한 다음, 아침에는 르포 기사를 올리고 싶다. ‘기자 뽕’에 취했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이상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시민들을 넘어 계엄군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명함이라도 한 장 쥐여 줄 수 있는 기자가 되고 싶다.”
합격까지 한 걸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영 일이 풀리지 않아 갑갑한 날이었다. 머리를 비우고자 ‘쇠질(무산소운동)’을 하고 막 샤워하고 나왔을 때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휴대전화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비상계엄’이라는 단어가 스쳤다. 기자 준비생 A씨는 다시 옷을 꺼내 입고 집 밖을 나섰다.
기자 준비생이 탄핵 국면을 지나며 SNS에 올린 소회. 이들은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의 오리지널바다이야기 국회부터 4월4일 탄핵 선고 당시 헌법재판소까지 여러 현장에 함께 했다. /본인 제공
한강 둔치에 차를 대놓고는 ‘따릉이’를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시끄럽고 정신없을 것 같던 국회 앞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따듯했다. 사람들은 ‘계엄 철폐’를 외치면서도 서로 가져온 음식을 나눴다. 카메라는 그런 시민들 야마토연타 을 비췄다. 국회 안에는 무장 군인이 들이닥쳤지만 시민들은 국회를 감쌌고, 그 뒤에는 기자들이 있었다.
12월 초, 한 해 공채가 끝나가고 있었다. 서른을 앞둔 나이에 ‘언론고시’를 그만둘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현장을 지키는 기자들을 보니 다시 한번 심장이 뛰었다. 시민의 자리를 넘어, 기자들이 서 있는 ‘저 자리’가 내가 있 사이다릴게임 어야 할 곳임을 느꼈다.
이날, 다시금 기자가 되기를 선택한 A씨는 11개월차 경제 매체 기자가 됐다. “밥벌이를 해야 한다면, 역사로 현장을 온전히 담아내는 일을 하고 싶다.”
기자 준비생이 탄핵 국면을 지나며 SNS에 올린 소회. 이들은 12월3일 비 야마토릴게임 상계엄이 선포된 날의 국회부터 4월4일 탄핵 선고 당시 헌법재판소까지 여러 현장에 함께 했다. /본인 제공
◇갈등을 뛰어넘어 위로와 공감을 그날 그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반으로 나뉘어버린 대한민국이 다시는 통합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을 앞둔 1월15일, 당시 한 릴게임오션파라다이스 일간지에서 2년차 사회부 기자로 일하던 B씨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대통령 관저 앞으로 향했다. 기온이 급격히 낮아져 유독 춥게 느껴지던 새벽이었다. 동이 틀 무렵 드디어 체포영장이 집행됐고, 체포 소식을 접한 대통령 지지자 한 명이 땅바닥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체포 촉구 집회에 참여하던 시민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다 잘될 거다’라고 속삭이며 그를 토닥였다.
좌와 우로 갈라져, 보수와 진보가 대치하는 모습에 우려가 터져 나올 때였다. 그런데 막상 현장의 시민들은 서로 적대시하거나 증오하지만은 않았다. B 기자는 갈등을 뛰어넘어 공감과 위로를 나누는 현장까지 조명하는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진보 성향의 언론사에서 수습 기간을 보낸 C 기자와 D 기자 역시 이념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우리 사회에 남아있음을 느꼈다. 탄핵 반대 시위, 기자로는 처음 나간 현장이었다. 명함을 전하면서도 긴장이 됐다.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폭행을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자 준비생이 탄핵 국면을 지나며 SNS에 올린 소회. 이들은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의 국회부터 4월4일 탄핵 선고 당시 헌법재판소까지 여러 현장에 함께 했다. /본인 제공
막상 현장에 나가자 시민들은 ‘빨갱이 언론’이라고 핀잔하면서도 시간을 들여 인터뷰에 응했다. 꽁꽁 얼어붙은 두 손을 보고는 고생이 많다며, 사탕과 핫팩을 꼭 쥐여 주기도 했다. “언론은 이념으로 인한 갈등을 극복할 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날 기자들은 몸소 느꼈다.◇‘함께’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 일요일이었지만 지하철역에는 사람이 쏟아질 듯이 많았다. 두툼한 패딩을 걸친 채 우르르 역사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목적지는 같았다. 남태령역 앞, 트랙터가 멈춰서 있는 곳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승호 아주경제 기자는 시민들이 경찰의 ‘차 벽’을 움직이는 모습을 봤다. 그 순간 ‘함께라면 이뤄낼 수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 시민들의 연대에 힘을 실을 수 있도록, 현장을 전하고 싶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을 꿈꾸던 학생 박승호에게 ‘기자’라는 새 꿈이 생겼다.
전북 전주에서는 ‘소외된 이웃과의 연대’가 이뤄지고 있었다. 12월7일, 비상계엄 직후 열린 첫 대규모 집회였다. 중앙지 기자를 꿈꾸던 전주 출신 C 기자는 이날 전북 지역 언론사에 입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발언대에 오른 시민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지역 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기자로서 고향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C 기자는 현재 전북지역 방송사 기자로 일하고 있다.
기자 준비생이 탄핵 국면을 지나며 SNS에 올린 소회. 이들은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의 국회부터 4월4일 탄핵 선고 당시 헌법재판소까지 여러 현장에 함께 했다. /본인 제공
이처럼 한겨울 광장엔 연대와 응원이 함께 했지만 그럼에도 ‘광장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지역 집회조차 열리지 않는 인적 드문 곳에 사는 사람들. 김민호 비즈한국 기자는 이들을 다룬 기사를 보며 목표가 생겼다. ‘소외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찾아낼 수 있는 눈을 갖겠다’는 것. 현재 김 기자는 노동과 기후 위기에 관심을 갖고 기사를 쓰고 있다.
1월부터 3월까지, 변화 없이 답답한 상황에서도 광장에서는 여러 감정이 오갔다. 1월 입사해 2주 만에 탄핵 찬성 집회를 취재한 권민주 경남도민일보 기자는 시민들의 열기를 몸소 느꼈다. 불법 계엄을 주동한 대통령이 체포되지 않고, 탄핵 심판이 늦어지고 있음에도 시민들은 주말이면 창원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칼바람에도 흩어지지 않는 시민들을 보며 권 기자는 ‘민주주의가 바로 서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주말을 반납하고, 집회 현장을 라이브로 송출하는 일이 즐거웠던 이유다. 주변에서는 “일 복도 많다”며 안쓰러워했지만, 권 기자는 현장에 갈 때면 가슴이 뛰었다.
기자 준비생이 탄핵 국면을 지나며 SNS에 올린 소회. 이들은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의 국회부터 4월4일 탄핵 선고 당시 헌법재판소까지 여러 현장에 함께 했다. /본인 제공
◇다시 ‘그날’이 온다면 박승호 기자는 서울 구로구에 살고 있다. 여의도까지는 자전거로 약 30분. 그날 새벽, 국회에 가기 위해 배낭에 짐을 모두 싸고 카메라도 챙겼다. 그런데 막상 발걸음이 향한 곳은 근처에 사는 친구 집이었다. ‘위험하지는 않을까.’ 막연한 두려움에 박 기자는 국회로 가지 못했다. 기자가 된 지금, 가장 아쉬움이 남는 날이다.
“계엄 그날, 현장을 기록하고 싶다.” 1년차 기자들은 지난해 12월3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에 입을 모아 이렇게 답했다. 통신사에 입사한 E 기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노트북을 챙겨 국회로 달려가, 통신사 기자답게 빠르게 속보를 쓰고 싶다고 했다.
“밤새 취재하며 ‘상보’와 ‘종합’ 기사까지 마무리한 다음, 아침에는 르포 기사를 올리고 싶다. ‘기자 뽕’에 취했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이상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시민들을 넘어 계엄군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명함이라도 한 장 쥐여 줄 수 있는 기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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